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감동글, 아름다운글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황정순 시인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
개울 물 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거야
잠 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주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랫동안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거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 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 죽으로 해야지
아마 당신 깔깔한 입안이 솜사탕 문 듯 할거야
이때 나직이 모짜르트를 올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이즐넛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볼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그래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때는
창 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울거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작은 토담집에 삽살개도 키우고
암탉에 노란 병아리도 키우고
조그만 움막 하나 지어서
뿔 달린 하얀 염소 키우며
나 그렇게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울타리 밑에는
봉숭아 나팔꽃 맨드라미 분꽃을 심고
집옆 작은 텃밭에는
가지 오이 고추 열무 상추를 심어서
아침이면 싱그러운 야채로
음식을 만들고 싶어
봄엔 파릇파릇한 쑥 국을 끓여 먹고
여름엔 머리에 잘 어울리는
풀 먹인 하얀 모시옷을 입고
가을이면 빨간 꽃잎 초록 댓잎 넣어
창호지를 바르고 싶어
겨울이 오면 잠 없는 밤
눈 오는 긴긴 밤을 당신과 얼굴 마주하며
다정한 옛이야기로 온 밤을 지새우고 싶어
나 늙으면
긴 머리 빗질해서 은비녀를 꽂고
내 발에 꼭 맞는 하얀 고무신을 신으며
가끔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어
한쪽 지붕에는 노란 호박꽃을 피우고
또 한쪽 지붕에는 하얀 박꽃을 피우며
낮에는 찻잔에 푸른 산을 들여놓고
밤이면 달빛 이슬 한 줌 담아 마시면서
남은 여생을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한 해가 가고 또다른 봄이 오면
당신 연베이지 빛 점퍼 입고
난 목에 겨자 빛 실크 스카프 매고
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 갈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같은...
여름엔
앞산 개울가에 당신 발 담그고
난 우리 어릴 적 소년처럼
물고기 잡고 물 장난 해 보고
그런 날 보며 당신은
흐릿한 미소로 우리 둘
깊어가는 사랑 확인 할거야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넛 보온병에 담아 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젊었을 땐 하지 못했던 사진 한 장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두어야지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뜰 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거야
눈이 내릴까?
그리고,
그리고 서점엘 가는 거야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 거야
지난날 우리 둘 회상도 할 겸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아름답고
좋은글이 있어서 여기에 적어봅니다.
황정순; 영화배우
출생; 1925년, 88세(만86세)
작품; 1943년 영화 '그대와 나'
종교; 기독교
2002년 현대시 문학 등단
현대시문학 편집장
제 7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네이버TV 좋은글 좋은시
링크: https://tv.naver.com/lemon21
유튜브체널 좋은글 좋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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